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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신데렐라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그들은 지금의 자신의 재투성이 모습이 언젠가 왕자님을 만나며 극적으로 달라질것이라 꿈꾸며 현실속의 왕자를 찾아 헤메곤 합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왕자는 그림자도 보지 못한 채 여전히 재투성이 아가씨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신데렐라를 꿈꾸며 왕자를 기다리는데 계속 재투성이인걸까요?

그것은 신데렐라라는 동화에서 그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데렐라에서 가장 중요한 역활을 하는 등장인물은 왕자님도, 계모도, 언니들도 아닌 바로 요정 할머니의 존재입니다.

계모와 언니들이라는 신데렐라의 현실과 왕자비라는 그녀가 이룩한 성과 사이의 갭은 어마어마합니다.
그 어마어마한 차이가 많은 이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나도 그녀처럼..' 이라는 꿈을 꾸게 만드는 원동력인것 입니다.

하지만 신데렐라라는 동화에서 신데렐라의 신분 상승은
재투성이 아가씨에서 마치 이웃나라 공주처럼 아름다운 아가씨로의 1단계와
유리구두를 신은 아름다운 아가씨에서 다시 왕자비라는 2단계로 나누어 보아야합니다.

비록 이 1단계의 상승은 12시가 지나면 풀려버릴 마법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무도회장의 모든 이들이 그녀가 왕자비가 되기에 합당해 보일정도로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이 1단계 신분 상승은
재투성이 평상복이 무도회장의 드레스로 변하고,
생쥐가 시종과 백마로 변하고,
호박이 마차가 되는 요술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1단계가 있었기에 신데렐라는
무도회 드레스가 웨딩드레스로, 시종이 궁중시종으로, 마차가 궁중마차로 변하는
1단계에 비해 작은 신분상승을 이루게 됩니다.

이와같이 진정 중요하며 가장 극적인 변화는 요정 할머니의 요술이었으나
우리는 종종 이 중간을 잊어버린채 시작과 결과만을 보며 '나도 신데렐라처럼...' 을 꿈꾸곤 합니다.
잊지 말아야합니다.

신데렐라를 꿈꾸는 이들이 진정 꿈꾸어야 하는 것은
'나도 언젠가 왕자님을 만난다면..' 이 아니라
'나도 요정할머니를 만난다면...' 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정할머니가 종종 잊혀지는 이유는
요정 할머니의 존재가 왕자보다 더욱 비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왕자는 그래도 한나라에 하나는 있을것 같지만
요정 할머니는 온세상을 뒤져도 있을것 같지 않은 존재이기에
우리는 요정 할머니의 존재와
요정 할머니의 요술을 모두 무의식적으로 부정하고
신데렐라가 왕자와 결혼했다는 그나마 현실에서 있을지도 모르는
미미한 현실감에 도취되는 것입니다.

요정 할머니의 존재를 기다린다면 현실 가능성이 제로가 되지만
왕자의 존재를 기다린다면 그래도 현실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게 되니까
사람들은 제로가 아니면 희망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여전히 현실속의 왕자를 기다리며 신데렐라를 꿈꾸는 이들은 생겨나고 있습니다.

신데렐라라는 동화는 사람들에게 꿈을 안겨주고
요정할머니라는 존재를 통해 그 꿈을 이룰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 잔인한 동화입니다.


 
 덧: 차라리 눈을 낮춰 콩쥐 팥쥐에서처럼 원님 아들을 노리며 황소와 두꺼비의 도움을 바라는 편이 현실감 있습니다.
마음에 드는 원님아들급이 있으면 "우리집에 금 송아지 있다" 라고 꼬드겨 두꺼비 몇병 먹이고 보쌈하세요.
요정할머니 만나 왕자님 낚기보다 현실감 있습니다. (먼달)


덧2: 그러니까 결국 나 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거니?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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